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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처음 공개한 후 올해부터 SBS와 케이블TV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는 《NEW 아기공룡 둘리》(이하 《NEW 둘리》). 김수정이 직접 애니메이션 제작과 캐릭터 라이선싱을 위해 ‘둘리나라’를 세우고 극장판 《아기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96)을 만든 이후, 다시 한 번 총감독을 맡은 작품이 바로 《NEW 둘리》다. 현재《NEW 둘리》는 공중파와 케이블TV에서 동시간대 시청률 상위에 오르며 《도라에몽》과 《짱구는 못 말려》를 능가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래서 진두 지휘하는 입장이자 원작자로서 김수정에게 감회가 남다르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아빠 된 사람으로서는 준비가 너무 길었던 점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드디어 나오긴 나오는구나’는 심정이었다고. 김수정은 “감회보다는, 그 동안 내 할 일을 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고백한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둘리라는 공룡 캐릭터가 처음 나오게 된 건 시대의 아픔(?)이 주효했다. “작품을 내던 1980년대 초반은 만화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사회적으로도 만화가 자체에 대해 색안경 끼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왜 이런 만화가 나와야 하는지’ 정치인들이나 기득권자들이 모두 안 좋게 보던 시절이었죠.” 김수정은 아동 본연의 모습을 만화에서 그대로 보여줄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아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결국 둘리라는 공룡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건 현실적인 제약을 의인화를 통해 넘어보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또 그는 남들이 아무도 하지 않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 ‘공룡’을 끌어들였다고 둘리의 탄생 비화를 밝힌다. 이렇게 해서 나온 둘리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반사회적이고 까칠하며 반항적인 성격에 비교육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이에 대한 김수정의 생각은 오히려 확고했다. 둘리가 가진 그 면면은 사실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이고, 27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방영되고 있는《NEW 둘리》는 어찌 보면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사실 1983년 원작을 처음 발표할 당시의 주 독자층이 기억하는 ‘둘리’와 1987년 TV 특집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만난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둘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요리 보고~ 조리 봐도~”로 시작하는 주제가로 익숙한 첫 TV 시리즈의 둘리는 원작의 악동 같은 둘리와는 달리 제법 착하고 순하다. 여기에 또 20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왕년에 TV로 처음 둘리를 접했던 세대와 이번에 처음 접한 세대가 완전히 달라진 것. 하지만 올해 방영되고 있는《NEW 둘리》는 원작 만화가 지니고 있던 ‘악동’ 같은 둘리의 면모와 일상을 고스란히 살렸다. 결국, 둘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에게 《NEW 둘리》는 오히려 원작 거의 그대로를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NEW 둘리》가 나오면서, 둘리 팬들 사이에서는 한가지 재미있는 논란이 일었다. KBS에서 방영된 첫 TV판 애니메이션에서의 둘리가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데 비해, 이번에 나온《NEW 둘리》는 원작의 악동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다 보니 ‘어느 쪽 둘리가 맞는지’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 하지만 김수정은 둘리의 악동 같은 면모 역시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같을 뿐이라 역설한다. “KBS판 둘리는 공영방송에 맞게 교육적인 면을 넣어야 했고, 작품으로서도 원작의 초반 부분만을 따 만든 것이기에 착한 둘리가 나온 것뿐이에요. 만약 특별편 몇 부작이 아닌 50부작 100부작이었으면 갈수록 둘리의 ‘까칠한’ 면이 나왔을 거예요.”

즉,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사회와 부딪혀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둘리 일당들의 모습도 세상을 공부하며 깨닫고 살아가는 성장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수정은 이렇게 강조한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자면 KBS판 둘리는 나름의 둘리로 즐거움을 갖고 보시면 되고, 《NEW 둘리》의 둘리는 새로운 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시면 됩니다. 둘을 계속 비교하면서 어느 쪽 둘리가 맞다거나 어울린다고 하면 저로선 난감해요.”

《둘리》라는 작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길동 씨다. 자기 자식 둘도 있는 판에 인간도 아닌 초록색 괴물(?)에다, 타조에, 외계인을 자처하는 녀석, 거기에 팔자에도 없는 조카까지 떠안은 인물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만 부리는 이 녀석들을 쫓아내고 싶어 안달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다 거둬 먹여 살리는 이 시대 만년 과장의 표상. 재미있는 점은, 어렸을 적 작품을 봤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에는 하나같이 길동이 아저씨를 욕했던 자기 과거를 ‘참회’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썽쟁이들을 거두는 길동이 아저씨는 대인이며, 돌아가셔서 화장을 하면 사리가 쏟아질 것, 새침부끄(평소엔 싫은 듯 트집 잡고 화내지만 사실은 애정을 품고 있음을 일컫는 일본어 조어 ‘츤데레’의 우리말 대체어) 하다”며 칭송하기도 한다.
길동이 아저씨가 이 불청객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모습, 한 상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차려 오라’ 시키는 모습,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속을 끓이면서도 가끔은 능청맞게 곯려주며 버릇을 잡는 모습들은 단순히 집주인이나 어른이라는 위치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둘리》가 등장했던 1980년대 초중반은 2009년 현재와는 정 반대로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한창 벌어지던 때다. 즉 핵가족 시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길동이 아저씨네는 항상 아이와 조카와 악동들에 늘 북적이고 있다. 또한 길동이 아저씨도 갈수록 불청객들을 쫓아내기보다는 같이 놀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등 어떻게 봐도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둘리 일당들에게 길동이 아저씨는 단순히 《톰과 제리》의 톰 역할이 아니라 대가족 시대의 아버지로서 이들을 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구도가 《둘리》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화 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일곱 개의 숟가락》도 한 가족의 왁자지껄하면서도 조금은 슬픈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핵가족 시대에 막 접어들던 그 시점에, 가족 그것도 크지 않은 집구석에 적지 않은 인원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사는 서민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김수정의 만화. 김수정에게 가족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김수정은 1950년 열한 남매 가운데 여덟째로 태어났다. 전쟁을 치른 직후로 매우 궁핍한 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중2 이후로 어머니가 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던 시절, 김수정은 ‘아르바이트가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속에서 아옹다옹 다투고 보듬는 삶을 살아왔던 그로서는 은연중에 가족들이 함께 비비고 살아야 했던 시절을 《둘리》와 《일곱 개의 숟가락》 같은 작품들에 투영했다.
《둘리》가 한 가족의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냈다면, 《일곱 개의 숟가락》은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려운 삶 속에서 울고 웃으며 희망을 찾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그 작품들 속 가족의 모습은 사춘기 소년 김수정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삶의 일부분, 일상 속 인물과 풍경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김수정은 또 등장인물도 모두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물상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둘리도 도우너도 또치도, 나아가 ‘성공할 생각도 별로 없고 내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플 뿐인 3~40대 직장인 가장’ 고길동도, ‘스타가 되고 싶은 20대’ 마이콜도, 모두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사람이 아닌 우리가 다들 지니고 있는 면을 담고 있는 인물상이라는 것. 김수정은 결국 우리네 삶과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온 것이다.
'둘리 아빠’로 늘 성공사례로 거론되곤 하지만 물론 김수정에게도 물론 굴곡은 있었다.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BS(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나《티처X》는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소위 ‘흑(黑) 역사’로 취급될 정도다. 이 작품들이 나왔던 1994년을 김수정은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최악의 시간, 인생에서 가장 피곤에 절어 있던 절정기”라고 토로한다. 지금에서야 웃음을 띠며 되돌아보지만, 그 당시에는 한 아이템을 여러 모로 고민해 이야기를 끌어내던 자기 스타일도 유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서 안 했어야 하는 작품 아닌가 하는 점은 동감해요. 10년 이상 《오달자의 봄》, 《소공자 블루스》, 《크리스탈 유》 등으로 내달리다 보니 《티처X》에 이르러서는…. 요즘 막장 드라마 막장 드라마 하는데 인생 막장에 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잘못됐다기보다 작품 중에서 이러한 경력도 있었다, 그리고 잘 만든 건 아니다, 그건 인정해요.”

사람들이 김수정 표 만화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먼저 꼽는 것이 바로 맛깔스러운 대사다. ‘우리말’로 오밀조밀하면서 입에 짝짝 달라붙는 특유의 대사감각은 김수정 만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중요 요소다. 첫 TV 시리즈와 극장 판으로 오면서, 원작 팬들은 그 대사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는 불만을 품기도 했다. 특히 만화와는 달리 실제 작품 진행 시간(러닝 타임)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가 마음대로 대사를 만들기가 더욱 힘들다. 게다가 극장판인 《얼음별 대모험》 개봉 당시엔 음향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실제 대사의 6할 정도가 들리면 잘 들리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극장판 제작 당시엔 아이들이 적어도 그림만으로도 내용을 따라가고 웃을 수 있게끔 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한다. 이번《NEW 둘리》는 26부작이라는 길이도 확보해 맛깔스러운 대사를 소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대사를 너무 많이 쓰면 오히려 주 시청자들에게 역효과가 날 수 있어 원작 만화와 극장판의 중간 정도로 절충하고 있다.
또한 김수정에게는 대사와 더불어 꼭 관철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 “일본 작품의 홍수 속에서, 나름대로의 민족관과 애국심이 생기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이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워요.” 김수정은 이를 위해 아직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더라도 우리 애니메이션을 보고 가슴을 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일례로 간판이나 상표 등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에도 우리의 거리나 우리 나름의 것들을 넣어, 아이들이 우리 것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김수정에게는 자식보다도 더 오래 동고동락한 사이로, 이젠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됐다는 둘리. 하지만 만화가로서도 또 애니메이션 업체의 대표로서도 김수정은 여기까지만 적당히 잘 하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 빈말이 아니라 ‘내년이면 환갑’인 이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총감독에겐 여전히 뭔가 또 만들어내려고 생각 중인 것들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득’하다.
《NEW 둘리》는 TV시리즈 또는 극장판 시리즈가 후속으로 예정돼 있고, 여력이 생긴다면 작은 악마 이야기인 《아리아리 동동》을 3D로 만들고 싶단다. 여기에 할 수 있다면 《일곱 개의 숟가락》을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따뜻한 색감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고 싶고, 나아가 자기 작품은 아니지만 김원빈의 고전 명작 《주먹대장》을 제작하고 싶은 포부를 밝힌다. 또 만화가로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 아름이다. “동자승을 통해 인생에서 품는 여러 의문에 대해 철학적인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고요. 현대판 일지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다뤄보고도 싶어요(일전에 한 인터뷰에선 ‘일지매’가 ‘일진회’로 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더 들면 짠내에 옷냄새에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성담론을 그려보고 싶기도 해요.”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길을 개척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이고 해야 할 일도 많아 보인다. ‘김파마’라 불릴 정도로 풍성했던 파마 머리도 싹둑 자른 채 부단히 뛰어다니는 그 모습이 열정과 패기 넘치는 젊은이 못지않게 반짝이고 있었다.
글 서찬휘 / 부천만화정보센터 만화규장각 전문필자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을 중심으로 다루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 잡지 매체를 통해 글을 발표해 왔으며 만화 언론 '만'(http://mahn.co.kr)창간을 주도, 2대 편잡장으로 재직중이다.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과에 출강하고 있다. 공저서로 '애니메이션 시크리트 파일', '조선을 그린 이두호', '2006만화산업통계연감', '2008한국만화연감' 등이 있다.
사진 김덕화 동영상 OBS경인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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