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블랙홀, 커피②

35년 만화인생, 둘리보다 오랜 친구
35년 내 만화인생은 언제나 커피와 함께였다. 80년대 만화 ‘둘리’를 작업할 때는 하루에 열잔 넘는 커피를 마셔댔고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 하루에 마시는 커피가 다섯 잔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술 한잔 입에 못 대는 나와 친구들이 만나는 곳이라곤 20대 때부터 늘 ‘다방’이었다. 조금 세련되어졌다 자평하는 지금도 카페나 커피전문점이 전부다. 그러니 하루에 다섯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커피를 마셔대는 내게 다른 차나 음료를 마셔보라 권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내게 커피는 늘 새로운 경험이었다.
커피를 처음 맛보았던 그 날은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60년대 말, 내 나이 18세. 커피믹스가 개발되기 전이기도 했고 커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적이었기에, 커피는 오로지 다방에서만 마실 수 있는 고급 음료였다. 그 시절 다방은 성인들이 출입하는 곳이었고 대학생이나 소위 ‘인텔리들’이 가는 장소의 대명사였다. 나에겐 미지의 성역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기회가 왔다. 고향인 진주 시내에서도가장 고급으로 쳐주던 ‘녹지다방’에 드디어 입성하게 된 것이다.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쯤 위인 한 친구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적인 첫 발걸음. 그때 처음으로 마셔본 커피의 달콤삽싸름한 맛이라니…. 75년경 만화가로 입문하며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인다방출입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커피를 마셨지만 녹지다방에서의 그 커피 맛은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커피의 본 고장이라는 유럽이나 세계 각지에서 마셔본 커피 맛과 비교해도 말이다.
“한 잔의 커피에 사랑을 담고, 또 한잔의 에스프레소에 인생을 이야기 한다”나는 에스프레소를 가장 좋아한다. 아메리카노를 많이 마시고 별식처럼 우유거품이 풍성한 카푸치노나 향이 강한 헤이즐럿을 마시기도 하지만 가장 즐기는 건 에스프레소다. 세련된 입맛을 지녔다고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지만 그 쓴 맛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면 변명처럼 나만의 노하우를 공개한다. 에스프레소 원샷에 각설탕 하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절대 저으면 안 된다는 것. 처음에는 씁쓸하고 시큼한 맛이 코를 찌르다가, 조금씩 녹으며 가라앉았던 설탕의 달콤한 맛이 섞이면서 진한 커피 향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에스프레소 한잔에서 참으로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나는 어느덧 27살이 된 ‘둘리’와 다시 씨름 중이다. 최근SBS TV를 통해 방영된 에니메이션에 이어 극장판 작품을 작업중이기 때문이다. 둘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만화가로 더 큰 보람이 있을까. 달콤쌉싸름한 에스프레소와 함께 하게 될 둘리와의 새로운 싸움, 힘들지만 향긋한 시간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김수정(만화가·(주)둘리나라 대표)
자료제공=KRUPS